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입니다. 허먼 멜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모비딕일 겁니다. 하지만 재미로 치면 1853년에 발표된 이 소설 필경사 바틀비가 더 월등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의미도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고전 소설에 거리감이 있으신 분들에게도 좋은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필경사 바틀비
주인공은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둔 60대의 나이 지긋한 변호사입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법조계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습니다. 그는 그간 만나온 사람들 중 바틀비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며, 그에 대한 회고를 시작합니다. 주인공의 사무실에는 터키와 니퍼스라는 별명을 가진 두 명의 필경사가 있었습니다. 터키는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대로 오전에는 매우 꼼꼼하고 차분했지만, 이상하게도 오후만 되면 안절부절못하며 서류에 잉크 자국을 만드는 등 실수를 연발합니다. 그런가 하면 20대 청년인 니퍼스는 반대로 오전까지는 늘 불쾌한 흥분 상태였다가 오후만 되면 차분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스타일이었죠. 터키와 니퍼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기도 했지만, 주인공은 매 순간 문제를 안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키가 크고 삐쩍 마른 한 남자가 일자리를 구하겠다며 찾아오는데 그가 바로 바틀비였습니다. 주인공은 안 그래도 새로 주 정부의 업무를 추가로 맡아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에 차분해 보이는 바틀비를 필경사로 고용합니다. 그런데 바틀비는 필경사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인 필사한 서류에 대한 크로스 체크 작업을 거부해서 주인공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는 바틀비가 안쓰러워서 다른 두 필경사에게 업무를 나눠 시킵니다. 게다가 바틀비는 우체국에서 편지 등을 찾아오는 지극히 정당한 업무 지시도 번번이 거절하는 통에 주인공은 그를 해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일요일 주인공이 자신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바틀비가 사실상 사무실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주인공은 외롭게 사는 바틀비를 측은하게 여겨 이를 묵인해 주지만, 바틀비의 업무 거부는 계속됩니다. 나중에는 그간 잘해오던 서류 필사 업무까지 거절하면서 주인공은 그를 해고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죠. 하지만 바틀비는 해고와 사무실 퇴거 명령도 거절하고 버티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은 경찰을 부르는 등 소란을 일으키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사무실을 옮겨버립니다. 다행히 바틀비는 새 사무실까지 따라오지는 않았지만 이전 사무실에 계속 눌러앉는 바람에 새로 입주한 변호사와 건물주가 그를 감옥에 보내버립니다. 주인공은 바틀비에 대한 측은지심이 강하게 남아 종종 감옥에 있는 그를 방문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던 바틀비가 숨이 끊긴 것을 발견합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틀비라는 등장인물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출신도 불명확한 그는 주인공의 사무실에 불쑥 찾아와 일자리를 요구하고, 고용주인 주인공의 정당한 업무 지시에 항거합니다. 더 최악인 것은 그가 업무를 회피함에 따라 다른 두 직원인 터키와 니퍼스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다는 겁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바틀비도 바틀비지만, 사실 주인공도 이해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업무 지시를 거부하는 직원에게 따끔한 조치를 하지 못하고, 해고 후에도 사무실에서 퇴거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바틀비가 감옥에 들어간 이후에는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시로 드나들며 그의 안부를 확인합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바틀리비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그로부터 느껴지는 불쌍함입니다. 언뜻 보기에 주인공은 동정심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바틀비에게 보이는 불쌍한 감정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같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동질감이자,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리고 바틀비의 최후를 확인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라는 문장입니다. 작가는 외롭고 불쌍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틀비를 대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 겁니다.
절실함은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소설 속에는 바틀비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그의 속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고용한 것은 결과적으로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은 그를 고용하며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보지 않습니다. 나중에 바틀비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바틀비를 조급하게 고용했다는 것인데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의 직원들인 터키와 니퍼스의 결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터키는 오전에만 뛰어난 업무능력을 보이고, 오후에는 사고뭉치가 됩니다. 반면에 니퍼스는 오전에는 시한폭탄이지만, 오후에는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죠. 어쨌든 오전과 오후에 업무가 진행되긴 했지만,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언제 사고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였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멀쩡해 보이는 바틀비의 등장은 주인공에게 있어서 한 줄기의 빛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앞뒤 가릴 여유도 없이 바틀비를 직원으로 받아들였고, 바틀비는 예상과 달리 터키나 니퍼스 이상의 애물단지가 되고 말죠.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절실할 때 그것을 채워주는 무언가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는 겁니다. 아무리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절박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면 판단력이 마비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절박한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다
바틀비는 정당한 업무 지시를 거부해서 주인공을 당황시키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업무 지시에 불응하면서 한 표현인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라는 것인데요. 원문에서 사용한 표현인 'prefer'는 선호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를 직역한다면 '나는 안 하는 것을 선호한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표현이 주인공과 다른 동료들에게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는지 사무실에서 일종의 유행어처럼 쓰이게 됩니다. 그들이 바틀비가 사용한 이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는 이유는 당시엔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장이라는 것의 특수성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당황했던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장에서 맡게 되는 업무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많은 사회초년생들이 토로한 고충 중 하나는 막상 일을 해보니 자신이 생각하던 일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직장생활 경험이 쌓여갈수록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더라도 해야 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합니다. 그 누구도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틀비가 사용한 'prefer'라는 표현은 현대의 직장에서도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의 처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을 씁쓸하게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보면 현대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쁜 사회 속에서는 남에게 연민과 동정을 베풀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해 내가 힘든 상황에서도 도움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