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 소개해 볼 책은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입니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1313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문학과 역사 등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특히 당대에 이미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던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그 스스로 신곡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단테가 전형적인 중세인으로서 종교적 관점의 신곡을 남긴 것과 대조적으로 보카치오는 인간적 관점에서 데카메론이라는 불후의 고전을 남겼습니다. 데카메론을 통해서 드러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원형은 당시 상업이 발달했던 나폴리에서 생활하면서 수집된 것이라고 합니다. 인문주의자로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은 그가 밀라노에서 만났던 페트라르카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등과 더불어 세계사 교과서에 반드시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이 책은 총 100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작가가 심취했던 단테의 신곡이 총 100편으로 구성된 것과 같습니다. 신곡이 중세 교회의 관점에 입각하여 쓰인 작품이라면 데카메론은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집필된 작품입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을 신곡에 대비해 인곡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읽어보신 분들은 생각보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에 당황하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세기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상기해 본다면 얼마나 파격적으로 여겨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데카메론 줄거리
이 소설은 10명이 각각 10개의 이야기를 하는 내용입니다. 134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위력적인 전염병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대책도 무용지물이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신앙도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에 놓이다 보니 사회는 흑사병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할 만큼 여러 분야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피렌체도 도시에 인적이 드물어진 상황에서 산타마리아 노벨레 성당에 7명의 부인이 미사를 위해 모이게 됩니다. 대개 20대인 그녀들에게 작가 보카치오는 팜피네아, 피암메타, 필로메나, 에밀리아, 리우레타, 네이필레, 엘리사라는 가명을 붙입니다. 그들은 죽음이 지배하는 피렌체에서는 몸과 마음이 모두 병들 뿐이니 함께 도시 밖으로 나가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별장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마침 그때 판필로, 필로스트라토, 디오네오라는 이름의 세 청년이 성당에 들어오고, 여자들은 이 세 청년에게 동행을 부탁합니다. 모두 10명이 된 그들은 여행 기간 동안 각자가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기로 합니다. 이를 위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주제를 내고 모두가 거기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하는데, 열 사람이니 모두 100가지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100가지의 이야기 중 인상적인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섯째 날의 주제는 사랑하는 연인이 불행을 겪다가 행복한 결말을 맺는 이야기이고, 그중 디오네오의 10번째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 페루자에 피에트로라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동성애자였으나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위장 결혼을 하기로 합니다. 그와 결혼한 아내는 이를 모르고 결혼했다가 한 번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 바람에 불만과 욕구가 쌓여가게 되죠. 그래서 그녀는 한 노파를 찾아가는데, 그 노파는 여자의 사정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녀와 사귀어줄 남자를 소개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느 날 피에트로가 저녁 약속이 있어 외출한 사이 여자는 애인을 집 안에 들이는데, 피에트로가 갑자기 일찍 귀가하게 됩니다. 놀란 여자는 애인을 닭장에 들여보내 숨기고 남편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피에트로가 일찍 귀가한 이유를 알게 되는데, 그가 친구의 집에 가 식사를 하려고 하던 중 창고에서 인기척이 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고에 가보니 친구 아내의 불륜 상대가 숨어 있었고, 이 때문에 집안이 뒤집어져 식사도 못하고 일찍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친구 아내를 욕하는데, 닭장에 숨어 있던 여자의 애인이 나귀가 손을 밟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고 맙니다. 이 때문에 피에트로는 그 남자를 발견하고 아내를 책망하자 도리어 그녀는 그간 쌓였던 불만을 남편에게 쏟아냅니다. 알고 보니 여자의 애인은 동성애자 피에트로가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여서 그는 두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여섯째 날의 주제는 기지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중 네이필레의 4번째 이야기입니다. 쿠라도라는 사람이 어느 날 키키비오라는 요리사에게 학을 보내 요리해 달라고 합니다. 키키비오가 한참 요리를 하고 있는데 그의 애인인 브루네타가 나타나 학 요리 맛을 보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처음에는 자신도 의뢰받은 요리를 하는 것이라 거절하지만, 끝내 애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결국 학의 다리 하나를 줘버립니다. 그리고는 다리 하나가 없는 학 요리를 쿠라도 앞에 내놓자 당연히 쿠라도는 화를 벌컥 내며 다리 하나가 어디 갔냐고 따집니다. 키키비오는 천연덕스럽게 학은 원래 다리가 하나라고 주장하고, 다음 날 아침에 쿠라도와 키키비오는 살아있는 학을 보러 나갑니다. 학들은 다리를 하나 들고 자는 습성이 있어 아침에 자고 있는 학들은 다리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고, 키키비오는 자기 말이 맞지 않냐고 우깁니다. 하지만 이에 속을 리 없는 쿠라도는 소리를 질러 학을 깨우고 학들은 두 다리를 사용해 날아오릅니다. 위기에 처한 키키비오는 어제 식사 때도 쿠라도가 소리를 질렀다면 다리가 하나 더 나왔을 거라고 하고, 그의 재치에 쿠라도도 웃으며 그를 용서해 줍니다. 10번째 날의 주제는 다른 사람에게 관대하게 대한 이야기이고, 그중 에밀리아의 5번째 이야기입니다. 우디네라는 마을에는 질베르트와 디아노라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디아노라를 안살도라는 기사가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디아노라에게 구애했지만 그녀는 한겨울에 5월의 정원을 보여주면 만나주겠다는 조건을 붙이며 사실상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하지만 집념에 불타는 안살도라는 마술사를 섭외해 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이뤄내고 한겨울에 봄의 정원을 보게 된 디아노라는 크게 놀랍니다. 질베르토는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되고, 마술사가 두렵기도 해서 안살도라를 만나 잘 얘기해 보라고 합니다. 안살도라는 자기를 찾아온 디아노라를 반갑게 맞지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남편의 사정을 털어놓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안살도라는 놀라고 부끄러워하며 디아노라를 돌려보내고 그녀는 감사하며 떠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마술사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떠납니다.
데카메론의 계기가 된 사건
데카메론은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서문으로 시작합니다. 서문에서 작가는 소설 속 화자인 10명의 남녀가 열흘 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게 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을 언급하는데 바로 흑사병입니다. 14세기 중반 피렌체를 강타한 흑사병 때문에 사람들은 극도로 우울감에 빠져 있었고, 이들 열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사를 위해 성당에 모인 7명의 부인과 3명의 청년들이 기분 전환을 하고자 나들이를 나선 것이 데카메론의 시작입니다. 서문에서 보카치오는 흑사병이라는 큰 재해가 사회에 미치는 비가역적인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기존의 도시 관습과는 상당히 다른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흑사병 이전과 이후의 사회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는 의미인데, 관습도 관습이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일 겁니다. 데카메론 속 10명의 사람들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성당에서 만났지만, 이들이 나누는 100개의 이야기가 다루는 주제는 지극히 세속적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남녀 간의 육체적 욕망을 그리고 있고, 속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과 대비하여 데카메론을 인곡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작품이 육체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금기시되었던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 세속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를 흑사병을 계기로 다루기 시작한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 가진 특성
데카메론을 읽어본 사람들은 아마도 수도사들이 보여주는 육체적인 욕망에 대해 놀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 느낌을 받는데, 카톨릭이 유럽 전체를 지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중세 유럽에 살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싶습니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나 실제 중세 수도사들의 삶보다는 인간의 욕망이 가진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욕망은 마치 흐르는 냇물과 같아서 강제로 억누르면 정상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카치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것인지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이란 과하면 시들해지는 법이고, 바라는 것을 제지당하면 더 간절해지기 마련이죠.'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억누를수록 방향이 왜곡될 뿐 아니라, 반발력도 강해져서 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메론에서 육체적인 욕망을 강하게 느끼는 두 부류가 있는데, 앞서 말한 수도사들 외에 또 하나는 바로 부인들입니다. 지금도 여성의 성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데, 중세 당시에는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이 때문인지 이 작품에 실린 100가지 이야기 중에는 여성의 욕구가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자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단 성적인 욕구뿐 아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부도덕하다고 낙인찍어 금기시한다면 욕망을 왜곡시켜 도리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작품의 가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은 들어봤을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 작품을 읽어보면 이게 왜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줄거리에 소개한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데카메론에 수록된 100가지 이야기 대부분은 특이할 게 없습니다. 문화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훈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내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500년 넘는 시간 동안 세대를 거듭해서 전수되는 이유는 분명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란 신과 종교에 대한 거룩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 냄새가 나는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한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보카치오는 100가지 이야기를 마친 후 마무리 글에서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의식했는지 데카메론의 집필 의도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중 제 눈길을 잡아끈 문장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죠. '하지만 나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적절한 언어를 쓴다면 발설하지 못할 정도로 부적절한 이야기는 없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유럽 전체가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중세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무수한 작품들이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라는 걸 생각하면 데카메론의 전위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하늘의 이야기를 위주로 다루던 문학 작품 세계를 땅으로 끌어내렸고 그 저변을 크게 확장한 전위적 작품인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보카치오 이후의 그 수많은 작가들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글로 남기지 못할 부적절한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는 작가의 거침없는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문학의 범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로 확장시킨 것이 데카메론의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남긴 저 문장은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위대한 문장인 것이죠.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유명한 고전이라는 정보 밖에 없었습니다. 데카메론이라는 제목을 보면 뭔가 거창하고, 거룩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짐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펼쳐본 책 속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