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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광대' 도서 줄거리, 단식 행위가 가진 의미, 증명, 표범

by 큰달이 202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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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해 볼 작품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입니다. 1922년 집필된 단식광대는 단식 공연을 하는 광대라는 특이한 설정으로 소외된 인간을 문학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인데요. 실제로 심한 후두 결핵으로 음식을 잘 삼키지 못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소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특유의 분위기가 잘 녹아있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20세기 초 당시에 얼마나 전위적으로 느껴졌을지 짐작이 가는 내용입니다.

단식 광대

단식 광대 줄거리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과거에는 단식을 전문으로 하는 광대. 즉, 단식 광대의 공연이 성업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관심이 시들어갑니다. 단식 광대의 공연은 단식 광대가 격자 창살 안에 짚을 깔고는 그 위에 앉아 물로 입만 축이면서 단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죠. 혹시라도 사람들이 진짜 단식을 하는 것인지 의심할 수도 있어서 주변에 감시자들을 두는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식광대 입장에서는 차라리 감시자들이 자신을 제대로 감시하면 모를까, 느슨하게 감시하는 것을 도리어 곤욕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단식 공연에서 단식은 최대 40일 동안 진행되고, 단식 기간이 종료되면 사람들 앞에서 단식 완주 기념식을 하는 것이 공연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단식 광대는 사람들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늘 우울해했는데, 혹자는 그가 우울해하는 것이 음식을 먹지 못해서라는 주장을 펼쳐 단식 광대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이런 단식 광대 공연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어가자 예전과 같은 별도 무대는 물론이고, 곡예단 옆의 가설무대에도 서기 어려워집니다. 그는 결국 곡예단 마구간 근처에 작은 무대를 세워 단식 공연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거의 없었고, 아이들에게 옛날에 이 공연이 인기였다는 말을 해주는 사람들만 간혹 있었습니다. 그의 단식 공연은 관객과 매니저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종료되고, 곡예단의 감독은 아직도 단식 중이냐는 냉소 섞인 질문을 합니다. 단식 광대는 도저히 맛있는 음식이 없어서 단식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는데, 감독은 단식 광대를 땅에 묻어버리라고 지시하고는 우리의 표범을 들여보내 사람들에게 구경하게 합니다.

단식 행위가 가진 의미

이제 이 작품의 감상평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단식이라는 행위가 가지고 있는 함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설은 한 시대를 풍미한 인기를 누리던 단식 광대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기를 잃고 사라져 버린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까지 단식 공연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심은 시들해졌고 메인 무대에서 멀어져 마구관 옆에서 공연을 할 정도로 홀대받습니다. 결국 단식 광대가 사람들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땅 속에 파묻히고 마는 비극으로 소설이 마무리됩니다.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단식이라는 행위, 굶는다는 것보다도 단식 공연이 사람들로부터 받는 취급이 변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엄청난 인기를 끌던 단식 공연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것은 시대와 유행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단식 공연이 인기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단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광대의 모습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왜 단식을 계속하고 있느냐는 곡예단 감독의 질문에 맛있는 것을 찾을 수 없어서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단식광대가 단식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 자신의 말대로 맛있는 음식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단식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졌다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단식 광대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관성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한 것이고,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비참한 결말을 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최후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땅에 묻히고 나서 그의 자리를 차지한 표범의 모습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단식 광대와 같은 장소였지만, 표범으로 바뀌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관심을 보입니다. 결국 이 소설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소외되고 있는 개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누구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가

다음으로 이 작품은 인간은 누구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번에는 광대란 직업에 집중하면 좋겠는데, 광대란 직업은 기본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자신의 삶을 보여주기에 주저함이 없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의 주인공 단식 광대가 자신의 모습을 증명하는 대상이 남들 뿐은 아니라는 건데요.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단식하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단식을 하는 40일 동안 항상 관객들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감시원을 붙여서 광대가 진짜 단식을 하는 것인지 확인합니다. 하지만 감시원들조차도 24시간 내내 그를 지켜볼 수는 없었는데, 단식광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정확하게 이어갑니다. 광대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공연을 보여주는 직업이지만, 단식광대는 자기 자신에게도 단식하는 자신을 보여주고자 했던 겁니다. 그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란 존재가 단순히 남에게만 보여주기 위해서 무언가를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SNS에 업로드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은 남들 보라고 올리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에게 스스로를 보여주고 증명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왜곡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표범

마지막으로 단식광대의 자리를 차지한 표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면서도 단식 공연을 고집하는 광대가 땅에 묻히는 장면입니다. 곡예단 감독은 단식광대가 차지하고 있던 우리 속에 표범을 풀어놓도록 하는데, 그제야 관객들은 열광하면서 자리를 뜨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단식 광대를 대체한 표범이라는 존재인데, 이 표범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매우 상징적이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표범은 단식광대와 달리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맹수로 먹고 싶은 것을 참지 않고 먹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관객들 입장에서 금욕적이고 정적인 단식 광대에 흥미를 잃고 있었기 때문에 정반대로 쾌락적이고 동적인 표범에 빠져들었던 것이죠. 이런 결말은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믿음이 옅어지고, 공격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20세기 초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안에 갇힌 채 자유를 잃은 표범의 모습은 물질적인 풍요에 눈이 멀어 진정한 자유를 잃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풍자한 것 같기도 합니다. 부족할 것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겉모습은 만족스러워 보였을지 몰라도 결국 표범은 우리에 갇힌 신세에 불과합니다. 당장 눈앞에 먹을 것, 경제적인 이득을 주면, 자신들의 자유를 아까워하지 않고 권력자들에게 갖다 바치는 민중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요?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단식 광대를 대신해 자리를 차지한 표범을 통해서 시대를 풍자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 리뷰였습니다. 다 읽고 나니 프란츠 카프카가 왜 유명한 작가인지 알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