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해 볼 책은 체코의 국민작가라 불리는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입니다.
작가 및 작품소개
보후밀 흐라발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독일에 의해 학교가 폐쇄되자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요. 이러한 경험이 그의 작품에 다양하게 녹아 있다고 합니다. 보후밀 흐라발이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라고 할 수 있는 49세 때인데요. 그렇지만 체코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라하의 봄 이후에 책 출간이 금지되었음에도 조국을 등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던 것으로도 유명하죠. 문학성으로도 인정받아 다양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97년에 입원해 있던 병원 5층에서 비둘기 먹이를 주다가 추락하여 사망해 체코 국민들의 아쉬움을 자아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책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원래 1976년에 집필된 소설입니다. 하지만 프라의 봄 이후 그의 작품들이 출간 금지되었던 탓에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1989년이 되어서였습니다. 이 소설은 폐지 처리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학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많이 읽힌 소설이기도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에 한 번쯤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줄거리
이 작품의 주요 줄거리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인 한탸는 폐지를 모아 처리하는 업체에서 압축기를 사용해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폐지압축공입니다. 벌써 35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는 한탸는 폐지 중에서 가치 있는 책들을 건져내 읽으며 나름의 지식을 쌓아온 사람이었죠. 그가 읽은 책들은 칸트나 헤겔, 니체 같은 철학자들의 책뿐만 아니라 휠덜린이나 실러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작품도 있었습니다. 한탸는 인간의 사상과 정신의 산물인 책들을 파괴한 것이 괴로워서였는지, 작업을 할 때는 항상 상당량의 맥주를 마셨습니다. 폐지더미 속에는 항상 야생쥐들이 종이를 파먹으며 살고 있었는데, 폐지를 압축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쥐들이 같이 압축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한탸는 마치 사람들처럼 쥐들도 패거리를 갈라 싸움질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며,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만차라는 이름의 여자와 잠시 교제한 적이 있었는데, 한 무도회에서 그녀가 화장실에 갔다가 옷에 배설물이 묻은 채 춤을 춰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잠시 헤어졌던 두 사람은 그 사건이 있은 후 5년 후에 다시 만나 함께 스키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한탸가 장난을 쳐 두 사람은 끝내 헤어지고 말았죠. 한탸는 가끔씩 젊은 시절에 만났던 만차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폐지 압축 작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맥주에 취해 도살장에서 넘어온 페이지를 압축하는 작업을 하던 한탸의 작업장에 2명의 집시가 방문하는데요. 떠돌이인 두 여자는 가끔씩 찾아와 폐지 더미 위에서 식사를 하며 휴식을 취하곤 했던 겁니다. 그들은 곧 작업장을 떠났는데, 이 모습을 목격한 작업소 소장이 나타나 한탸가 외부인들을 출입시킨 것에 대해 화를 냅니다. 평소 한탸가 게으르게 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소장은 그에게 부탁이니 일을 좀 제대로 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얼마 후 한탸는 부브니라는 곳에서 한탸의 압축기의 20배 효율을 가진 거대 압축기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와 그곳을 방문하죠. 거기서 그는 젊은 인부 둘이 폐지를 압축하는 장면을 목격하는데, 그들은 책이건 뭐건 기계적으로 압축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한탸는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압축공으로서의 자신의 직업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게다가 그때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폐지 처리 현장 학습을 오는데, 아이들이 가치 있는 책을 알아보지 못하고 찢어발기는 것에 안타까워하죠. 수심에 잠긴 채 거리로 나온 한탸는 한 노인이 천사 조각상을 조각하는 것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만났던 만차가 그 조각가와도 연인 사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그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만차야말로 누구보다도 멀리까지 나간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폐지압축공으로서 그의 은퇴는 다가옵니다. 그동안 한탸가 폐지 더미 속에서 가치 있는 문서들을 찾아 건네주곤 했던 노 교수가 찾아오는데, 한탸는 그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거리에 나온 한탸는 슈트룸이라는 사람과 마주치는데, 그 역시 한탸로부터 가치 있는 자료를 받아오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탸는 한 술집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자신의 과거를 회고합니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작업장으로 돌아가 폐지를 압축하는 공간에 몸을 밀어 넣고 기계를 작동시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역설적 표현의 전형
이제 이 작품의 감상평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길지 않은 소설의 제목은 역설적 표현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독과 시끄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인데, 이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는 시끄럽지만 고독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독하지만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비슷한 의미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뉘앙스가 다르죠. 전자는 시끄러운 외부의 상황 속에서도 내면이 고독하다는 뜻으로, 후자는 고독한 상황 속에서 내면은 시끄럽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작품 속 주인공인 한탸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후자의 해석이 적절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탸는 35년 동안 폐지압축공으로 생활해 온 사람입니다. 그는 외롭게 작업을 수행하면서 고독하게 살아온 인물이죠. 하지만 외부에서 보는 고독함과 다르게 그의 내면은 갖가지 생각과 사상으로 뒤얽혀 시끄러운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은 한탸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끝없이 느끼는 것들을 쏟아내는 형식이기 때문에 조용한 느낌은 아닙니다. 겉으로 평온하고 반복되는 듯한 일상 속에서 한탸는 내면의 갈등과 성찰, 지식 습득을 끊이지 않고 해온 겁니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끓어오르는 내면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어떻게 생각하면 이 시끄러운 고독은 한탸라는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표현이 아니라, 그의 조국 체코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체코지만 실제로 그 내부는 시끄럽고 끓어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탸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역사적 혼란을 꿋꿋이 이겨낸 조국에 대한 찬사로 보이기도 합니다.
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
다음으로 쥐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폐지 더미 속에서 살면서 폐지를 갉아먹고 살아가는 쥐들의 모습입니다. 한탸는 폐지 압축 작업을 하면서 일일이 쥐들을 분리해 낼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쥐들이 폐지와 함께 압축되어 죽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죠. 그러면서도 그는 쥐를 죽게 만드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쥐를 계속 부각하면서 이를 사람에 빗대고 있다는 겁니다. 주인공인 한탸만 하더라도 사실 폐지 더미를 처리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폐지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쥐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탸보다도 고상한 일을 한다는 지식인들조차도 사실 책에 의존해 살아간다는 점에서 책을 갉아먹는 쥐와 다를 바 없음을 암시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자기 스스로 압축 기계 속으로 들어가 기계를 작동시키는 장면은 쥐의 자신을 직접적으로 이입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인간을 특별히 하찮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동물인 쥐에 비유한 이유가 있습니다. 쥐들이 떼를 지어 서로를 공격하는 것처럼 인간들 역시 무리를 짓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행동을 역사상 끊임없이 지속해 왔기 때문이죠. 작가는 쥐에 인간을 빗대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이 폐지더미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쥐떼 간의 싸움과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하는 것 같습니다.
한탸의 마지막 선택
마지막으로 한탸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는 자신이 견고하게 붙잡고 있던 것들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소설 내내 그는 자신이 해온 폐지압축공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랬던 한탸가 부브니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압축 기계의 20대 분량에 해당하는 효율성을 가진 신식 기계를 본 이후에 직업에 대한 위기의식을 갖습니다. 자신이 언제 실직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가 평생을 바쳐온 직업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이 허망한 것임이 드러나죠. 또한 그는 더 중요한 허무함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지식이 인간 사회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함을 발견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는 단순히 폐지를 압축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폐지 더미 속에서 가치 있는 서적들을 발굴해 꾸준히 지식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상당 수준의 철학, 문학 지식을 갖추게 되었지만, 직업의 안정성이 흔들리면서 찾아온 방황에 이런 지식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죠. 이 두 가지의 허무함 때문에 한탸는 지난 35년간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자기 존재의 부정에 직면한 그는 마침내 폐지더미 속에 자신의 육체를 밀어 넣고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죠. 그의 결말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서 자기 존재의 가치와 근원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대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마치 에스프레소처럼 짧지만 진한 작품이였습니다.